여주, 명성황후 생가 유적지... 2018, 11, 13

2018. 11. 18. 23:11경기도

명성황후 생가는

조선 26대 고종황제의 비 인, 명성황후가 탄생(1851년)하신 곳이다.


명성황후 생가


명성황후 생가 안채는

명성황후가 출생하여 8세까지 살던집이다.


1687년(숙종13)에

왕의 장인 민유중의 묘막(墓幕)으로 건립되었는데 당시 건물로서 남아 있는 것은 안채 27평뿐이었다.


1976년도에 안채가 중수되었고

1995년도에는 행랑채와 사랑채, 초당 등이 복원됨으로써 면모가 일신되었다.


명성황후 생가의 안채


명성황후의 초상화


생가 앞, 하마비


이 비석앞을 지날때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타고가던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새긴 석비


추모비


명성황후의 애국에 대한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


승모비


명성황후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


탄강구리비의 누각


명성황후탄강구리(明成皇后誕降舊里碑)라는 말은

명성황후가 탄강하신 마을이라는 뜻이다.


비석에 새겨진 이 글은 고종황제가 직접 쓴 친필이라고 한다.


민유중의 신도비


민유중은 인형왕후의 아버지로

조선 제 19대 임금 인, 숙종의 장인이며 명성황후의 6대조 할아버지이다.


민가


기념품과 음식점이 있다.


소원바위


민유중의 5대손이며,

명성황후의 아버지 인, 민치록은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한 채, 부인 오씨와 사별을 한다.


두번째로 얻은 부인 한산 이씨와의 사이에선 1남 2녀를 두었으나 모두 일찍 죽었다.

 

민치록은 장남으로서

 집안에 자식이 없자 부인과 집 근처 이 바위 앞에서 지성을 드렸다.

 

그의 나이 53세에

딸을 얻게 되었는데 그 분이 명성황후이시다.

 

명성황후가 태어나던 1851년 11월 17일 새벽

붉은 빛이 비추고 기이한 향기가 방안 가득 채워

명성황후의 예사롭지 않은 탄생을 알리는 하늘의 전조였다고 하였다.


이후,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소원 바위라고 부른다고 한다.


감고당()


조선시대 제19대  왕, 숙종이

인현왕후의 친정을 위하여 지은 집으로

인현왕후가 희빈 장씨의 모함을 받아 폐위된 후 5년여 동안 유배되어 있던 곳이고,

명성황후가

8살때 여주에서 한양으로 올라간 후 1866년(고종3) 왕비로 책봉되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다.

 

원래

종로구 안국동 덕성여고 본관 서쪽에 있다가 1966년 도봉구 쌍문동으로 옮긴후

2004년 쌍문중고교 신축계획에 따라 철거될 위기에 처한 건물을

2006년 해체한 후에 명성황후의 고향[여주]으로 원형을 이전 복원하였다.


왕비로 책봉된 명성황후는

과거 인현왕후의 일을 회상하여 '감고당()'이란 이름을 붙였다.


감고당 사랑채


중문채


안채


뒷산에서 본 감고당




명성황후 기념관


명성황후와 고종의 초상화



명성황후 어찰(御札)


명성황후의 서찰 20장을
한데 묶어 제책한 것으로 모친(한산이씨)이 보낸 서찰에 대한 답장이다.

이 서찰은
명성황후의 부드럽고 정겨운 면과
냉철한 면의 두 성품이 잘 드러나 있다.  

 명성황후 구국이념(이이제이)


[외세의 침략은 외세의 힘을 이용해서 막는다]
명성황후의 구국이념인 이이제이 사상 -

서구 열강과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침략하던 시기에
나라의 근본인 백성이 굳건해야
나라가 편안할 수 있다고 믿었던 명성황후는
뛰어난 인재를 고루 등용했으며,
외교적으로는
외국의 침략 세력끼리 서로 견제하고 싸우게 하는
‘이이제이’론을 펼쳐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하였다.




아! 옥호루


조선 26대 왕인
고종 32년(1895) 10월 8일!

옥(玉)으로 만든 항아리 같이 생겼다 해서 이름 붙여진 경복궁 내 옥호루에서 전대미문의 국모 시해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우의 지휘 아래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그 시신을 불에 태운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명성황후 국장(國裝)


일제는
10월 8일에 명성황후를
난자 시해하고 시신은 궁궐밖으로 운반 소각해 버렸다.
 
그 뒤
일제의 강압으로 폐위되어 서인(庶人)까지 되었다가
광무 일년에 복호(復號)되었으며
1897년에 명성(明成)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그 해 11월 국장으로 청량리 홍릉으로 옮겨져 조성되었다가 후에 고종과 함께
현 위치인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이장하여 자리 잡았다.



 시해도


1895년 양력 10월 8일 새벽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두 번째 칼을 휘둘러 명성황후를 절명케 한 칼로서 길이는 1m 20cm 로 성인이 한 손으로 휘두르기에 힘겨울 정도로 무겁고 아직도 날이 시퍼런 살상용 칼이다.

칼집에는
[一瞬電光剌老狐](단숨에 전광과 같이 늙은 여우를 베었다) 라는 섬뜩한 글이 적혀 있으며 작전명을 [여우사냥]이라고 붙였음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명성황후 어보


왕비 어보는
시호나 존호, 묘호를 내릴 때마다 어보를 새겨놓고 실제는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며, 종묘에 보관하였었으나 현재는 역대 왕과 왕비 어보는 궁중 유물관에 보관하고 있고, 명성황후 어보는 총 10개가 있다.



 고종어첩


고종이 1885년 정월 보름날 이범진에게 내린 [천운] 이란 어첩

 지휘도


명성황후 당숙이신 민치일이 1887년 호서수군방어사 당시 사용하였던 지휘용 칼 (1880년)




연못 팔각정에서 본 생가


큰 길에 세워진 명성황후의 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