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궁[창덕궁, 창경궁]나들이... 2020, 01, 04,

2020. 1. 7. 00:11서울

창덕궁은

1405년(태종5) 경복궁의 이궁으로 동쪽에 지어졌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소실되고 광해군 때에 다시 짓는 과정에서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기 전까지 조선의 법궁(法宮) 역할을 하였다.


또한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했던 궁궐이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창덕궁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와 한국의 정서가 담겨있다는 점에서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돈화문(敦化門:보물 383호)은

규모와 품위를 함께 갖춘, 창덕궁의 정문이다.      

 1412년(태종 12)에 건립되었으며

 창건 당시 창덕궁 앞에는 종묘가 자리 잡고 있어 궁의 진입로를 궁궐의 남서쪽에 세웠다.

                                   

진선문과 금천교(錦川橋)(보물:제1762호)


금천교는 창덕궁의 돈화문과 진선문(進善門) 사이를 지나가는 명당수(明堂水)위에 설치되어 있다.

금천교는 숱한 화재와 전란에도 불구하고 창건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현존하는 궁궐 안 돌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인정전(仁政殿:국보225호) 

창덕궁의 정전(正殿)으로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인정전



낙선재(樂善齋)(보물:제1764호)

헌종의 검소한 면모가 느껴지는 곳으로

헌종의 후궁 인, 경빈의 처소로 지은 건물이다. 


순종황제의 비 인, 순정효황후가 마지막까지 살았던 곳이며,

일본에서 돌아온 덕혜옹주, 영친왕의 비 인, 이방자 여사도 마지막까지 살았던 곳이다.




창경궁


통명전[오른쪽]보물 제818호 과 양화당[왼쪽]


통명전은

희빈 장씨의 인현왕후 저주 사건이 있던 곳으로 왕비의 침전으로 내전의 으뜸 전각이다.


양화당은

인조가 병자호란 후 남한산성에서 돌아와 이곳에서 장기간 머물렀던 곳이다.

또한 이곳은 25대 철종의 왕비 철인왕후 김씨가 간병을 받다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창경궁의 춘당지(春塘池)는 원래 조그마한 연못이었으나 1909년 일제에 의해서

내농포(임금이 직접 밭을 일구고 농사의 풍·흉을 예측하던 곳)가 헐리면서 지금의 호리병 모양이 되었다.










문정전


창경궁의 편전으로,

국왕이 관리들과 만나 업무 보고를 받고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던 집무실이었다.


이곳은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라고 명하고 서인으로 폐한 곳이기도 하다.

 

이후 뒤주는 홍화문 남쪽에 있는 선인문 안뜰로 옮겨졌고,

사도세자는 8일 동안 굶주림과 더위에 신음하다가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용담씨앗


창덕궁 돈화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