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의 가을... 2021, 10, 31

2021. 11. 9. 21:25서울

창경궁(昌慶宮)의 처음 이름은 수강궁(壽康宮)으로,

1418년 왕위에 오른 세종이 생존한 상왕 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궁이었다.

 

창경궁의 역사는

성종 13년(1482) 창덕궁의 수리를 논하는 자리에서 대비전의 세 어른 인,

세조의 비 정희왕후, 덕종의 비 소혜왕후,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를 모시기 위해

폐허처럼 남아 있던 수강궁 수리를 명하면서 시작된다.

 

 

명정문[明政門. 보물 제385호]과 옥천교[玉川橋. 보물 제386호]

 

 

창경궁의 정전, 명정전[明政殿국보 제226호]

 

 

 

 

문정전[文政殿]

혼전[魂殿]으로 사용되었으며 마당에서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게되는 비운을 겪은 곳

 

 

경춘전(景春殿)

 

왕비나 세자빈이 머물던 공간으로

산실청으로도 임시 사용되었다고 한다. 

 

정조와 헌종이 태어난 곳이며,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와 사도세자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머물던 공간이다.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현판은 순조의 어필로 알려져 있다. 

 

 

통명전(通明殿) [좌]은

보물 제 818호로 창경궁 내전의 중심 건물로 꼽는다.

 

용마루가 없는 것으로 보아

주로 왕비나 대비가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장희빈의 인현왕후 저주사건이 있기도 한 곳이다.

 

 

양화당(養和堂)[우]은

통명전과 함께 내전으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하며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떠났던 인조가 돌아와 잠시 머물던 곳이다. 

 

일제 강점기에

창경궁이 동물원으로 격하되었을때는

창경원 관리 사무소로 쓰였다고 한다. 

 

 

함인정(涵仁亭) 

 

영조가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을 접견하던 곳. 

 

『궁궐지』에는

‘함인’의 뜻을 ‘해동(海東)의 만 가지가

인의(仁義)에 흠뻑 젖는다’라고 기록돼 있다.

 

 

창경궁 대온실

 

일본인들이 창경궁을 동물원과 식물원으로 꾸미면서 만든 유리 온실.

 

춘당지

 

원래는

두개의 연못 중에 작은 연못이 춘당지였다.

 

큰 연못이 있던 자리는

조선의 임금들이 직접 농사를 짓던 내농포라 불리는 권농장이었는데 

일제가 연못으로 만들어 춘당지라 하였다. 

 

춘당지의 원앙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