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돌아보기... 2022, 03, 06

2022. 3. 12. 23:50서울

안국역에서 나와 

창덕궁을 지나 함양문을 통해 창경궁으로 건너간다. 

 

 

창덕궁[세계문화유산]의 정전 인정전[국보]을 인증으로 한장... 

 

 

 

창경궁(昌慶宮)의 처음 이름은 수강궁(壽康宮)으로,

1418년 왕위에 오른 세종이 생존한 상왕 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궁이었다.

 

창경궁의 역사는

성종 13년(1482) 창덕궁의 수리를 논하는 자리에서 대비전의 세 어른 인,

세조의 비 정희왕후, 덕종의 비 소혜왕후,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를 모시기 위해

폐허처럼 남아 있던 수강궁 수리를 명하면서 시작된다.

 

 

 

경춘전(景春殿)

 

왕비나 세자빈이 머물던 공간으로

산실청으로도 임시 사용되었다고 한다. 

 

정조와 헌종이 태어난 곳이며,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와 사도세자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머물던 공간이다.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현판은 순조의 어필로 알려져 있다. 

 

 

 

통명전(通明殿) [좌]은

보물 제 818호로 창경궁 내전의 중심 건물로 꼽는다.

 

용마루가 없는 것으로 보아

주로 왕비나 대비가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장희빈의 인현왕후 저주사건이 있기도 한 곳이다.

 

 

양화당(養和堂)[우]은

통명전과 함께 내전으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하며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떠났던 인조가 돌아와 잠시 머물던 곳이다. 

 

일제 강점기에

창경궁이 동물원으로 격하되었을때는

창경원 관리 사무소로 쓰였다고 한다. 

 

 

 

경춘전[좌]의 경춘(景春)은

'햇볕 따뜻한 봄'이라는 뜻이다.

 

1484년(성종 15) 창건 당시에 건립된 침전 건물로

주로 왕대비, 왕비 또는 세자빈 등이 거처했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이괄의 난 등으로

여러 차례 소실되었다가, 1834년(순조 34)에 중건되었다.


편액의 글씨는 순조의 어필이다.

이곳에서는 22대 정조와 24대 헌종이 태어났고,

성종의 생모 소혜왕후, 즉, 인수대비 한씨와 숙종비 인현왕후 민씨,

정조의 생모 헌경왕후, 즉 혜경궁 홍씨 등이 승하하였다.


사도세자는 정조를 낳기 전에

용이 이곳 경춘전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경춘전 동쪽 벽에 용 그림을 그려두었다.

정조는 본인의 탄생을 기념해 경춘전 내부에

‘誕生殿(탄생전)’이라 쓴 현판을 걸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환경전[우]의 환경(歡慶)은

‘기쁘고 경사스럽다‘라는 뜻으로 창경궁의 내전(內殿) 건물 중 하나로

세자나 국왕이 생활하던 곳이며, 중종과 소현세자가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성종 때(1484년) 창건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지고, 1616년(광해군 8)에 중건되었다가,

1830년(순조 30)에 화재를 당한 후 1834년(순조 34)에 다시 중건되었다.


이 건물은 빈전과 혼전으로 사용된 예가 많았는데,

빈전은 왕 또는 왕족의 시신이 들어 있는 재궁(관)을 모신 건물을 말한다.

 

 

 

문정전[文政殿]

혼전[魂殿]으로 사용되었으며 마당에서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게되는 비운을 겪은 곳.

 

 

 

창경궁의 정전, 명정전[明政殿국보 제226호]

 

 

 

명정문[明政門. 보물 제385호]에서 본 옥천교[玉川橋. 보물 제386호]와 홍화문[보물]

 

홍화문(弘化門)

창경궁의 정문으로 '덕을 행하여 백성을 감화시키고 널리 떨친다는 뜻'이다. 


홍화문은 국왕이 직접 백성들을 만났던 곳이기도 하다.

영조는 1750년(영조 26) 양반과 평민들을 만나 균역에 대한 의견을 듣기도 하고,

정조는 1795년(정조 19)에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하여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준 곳이기도 하다.

<홍화문 사미도(弘化門 賜米圖)> 라는 기록화에 그 모습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소나무숲

 

 

 

춘당지

 

원래는

두개의 연못 중에 작은 연못이 춘당지였다.

 

큰 연못이 있던 자리는

조선의 임금들이 직접 농사를 짓던 내농포라 불리는 권농장이었는데 

일제가 연못으로 만들어 춘당지라 하였다. 

 

 

 

원앙새

 

 

 

쇠동고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