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의 봄... 2017, 04, 06

2017. 4. 9. 21:28서울

조선조 3대 임금인 태종은

1405년에 제2의 왕궁으로 창덕궁을 창건했다.

 

수도 한양의 서쪽에는 경복궁이, 동쪽에는 창덕궁이 위치하여 균형잡힌 도시공간을 구성할수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탄 후

경복궁은 재건되지 않았고 270년 동안 창덕궁이 조선 제1의 정궁으로 역할하였으며

마지막 임금인 순종때까지 사용 된 최후의 궁궐이기도 하다.

 

동쪽의 창경궁과 함께 하나의 궁궐로 사용되어 동궐이란 별칭을 갖고 있다.

 

중국을 비롯한 동양 궁궐 예제는

남북 중심 축을 따라 엄격하게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경복궁 역시 이 제도를 따랐다.

 

그러나

산자락에 자리잡은 창덕궁은 인위적인 제도를 벗어나 주변 자연 지형에 순응하고 변화를 거듭하면서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 되었다.

 

1917년에 대조전을 비롯한 내전들이 불타 없어지자

경복궁의 전걱들을 헐어다 옮겨 짓는등 많은 건물들이 변형 훼손 철거 되었다가 1991년부터 복원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덕궁은 조선 궁궐의 원형을 비교적 충실히 지니고 있으며

동궐의 후원은 한국 전통 조경의 특성과 아름다움을 가장 훌륭하게 구현한 예로 평가된다.

 

1997년 12월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으로 왕의 즉위식이나 외국 사신 접견등 나라의 공식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1908년 인정전 내부를 고치면서 커튼, 전등설치등 서양식 실내장식이 도입되었다.

 

대조전은

침전으로 왕비의 생활공간이었으며 왕실 생활의 마지막 모습이 비교적 잘 남아있다.

 

대조전 뒷마당은

왕비의 단조로운 궐내 생활에 따른 심신을 달래기 위해 아름답게 꾸며놓은 것으로 짐작한다.

 

낙선재

 

 

 

 

 

 

 

낙선재

 

헌종은 명헌왕후에게서 후사가 없자

1847년 김재청의 딸을 경빈으로 맞아 중화당 동쪽에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등을 지었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겸 사랑채였고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였으며

수강재는 수렴청정이 끝난 순원 왕후를 모신 곳이었다.

 

헌종의 뜻에 따라 낙선재는 단청을 하지않은 소박한 외형을 지녔으며

또한 외국 문물을에 대한 왕의 기호를 반영하듯 낙선재 창살 무늬와 상량정의 건축양식 중에서 청나라 양식을 볼수 있다.

 

 

낙선재의 현판은 청나라의 대가 섭지선의 글씨이다.

 

 

 

바람에 날리는 수양벚꽃

 

 

 

 

 

 

 

 

 

 

 

 

 

궐내각사

 

 

꽃피는 봄에 다녀오려고 남겨두었던 창덕궁 나들이를 하였다.

 

한창이던 홍매화는 서서히 지기 시작하였고 날씨도 흐린데 많은 관람객들과 진사들 발길에

빠르게 돌아 보며 사진을 찍을수가 없어 후원은 가을에 가기로 또 남겨놓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