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1. 25. 14:06ㆍ남한산성의 풍경과 꽃
남한산성 성지 성당에서 연미사 봉헌을 끝내고
평지길만 따라 홀로 걸어 보았다.
역사를 따라 걸어본 발자취도 될수 있고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본 성지 순례도 될수 있다.
연무관[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6호]
군사들의 훈련을 위하여 건립한 곳으로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쌓을 때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연무관은
규모가 크고 육중하여 높은 기단 위에 자리 잡고 있다.
건물 내부 대들보에는 전, 후면에 용을 그렸고
측면 쪽 대들보에는 봉황을 그려 넣은 것이 특이하다.
연무관 정면
천주교 박해 당시
서울에서 압송해온 신자들을 이곳에서 취조, 고문을 했다고 함
지수당[경기도 문화재자료 제 14호]
현종 13년(1672)에 부윤 이세화가 건립한 정자로
건립 당시에는 앞뒤에 3개의 연못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2개만 남아 있다.
정자의 동쪽에는 부윤 이세화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고
제3연못지로 추정되는 지역은 현재 논으로 바뀌어 있다.
서흔남 묘비[광주시 향토문화유산 기념물 제 6호]
서흔남은 병자호란 당시
무당, 와장[瓦匠]등의 직업으로 전전하며 수어청 사노를 담당했고
1637[인조 15]에 청나라가 남한산성을 포위하자
병자, 불구자, 거지로 변장하면서 외부연락을 담당했다.
이러한 공으로
노비에서 당상관[지금의 장관]으로 신분이 바뀌었으며
이후 남한산성 보수공사에서 목재 조달업무 관장을 했다.
후에
정 2품 가의대부로 책봉되고 종2품 동지중추 부사가 되었다.
이 비는 부인이 죽은 후 다시 세운것이라고 전해지며
광주시 검복리 병풍산에 있던것을 1998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동문[좌익문]
제 11암문[시구문]
천주교 신자들을 동문밖에서 처형하기 위해 끌고 나간 문이다.
동문밖에서 처형된 신자들이 이 물줄기에 버려졌다고 한다.
시구문 죄측 성곽
동문
현절사[顯節祠]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4호]
병자호란 때 적에게 항복하기를 끝까지 반대했던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삼학사의 우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청나라에 강제로 끌려가 곤욕 끝에 참형을 당한 삼학사의 영령을 위로하고자
숙종 14년(1688) 세워졌으며 후에 김상헌, 정온의 위패도 함께 모셔졌다.
죽어서도 임금을 향한 강직한 선비정신의 상징적 건물로 여겨진다.
비가 오는데 벌봉쪽으로 가시는 노부부
현절사 앞, 단풍
비가 와서 이젠 가을이 떠날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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