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갑곶 순교 성지 순례... 2014, 10, 12

2014. 10. 14. 22:58성지.성당

 

강화 갑곶 성지의 박순집 베드로의 묘소

(1830~1911)‥

 

 

 

 

강화 갑곶 성지에는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시는 일에 일생을 바친 박순집 베드로의 묘가 모셔져 있다.

참수 치명자는 아니나 그의 생애는 어느 순교자 못지않은 삶을 살았다.

 

새남터와 서소문밖에서 순교한 수많은 유해를, 목숨걸고 찾아내 안장했으며

후에 순교자들의 행적을 증언해 유해발굴과 시복시성에 큰 역할을 했다.

 

훈련도감 포수로 있던 그의 부친 박바오로는 새남터에서 순교하는 장면을 직접 볼 수가 있었다. 

앵베르주교, 샤스땅신부, 모방신부의 시신을 수습하여 옮기는데 교우의 도움을 받아

잘라진 머리 셋은 긴수염을 입에 나눠 물고 3구의 시체는 등에 업고 양팔에 끼고 나와 기다리고 있던 교우들의 도움을 받아 노고산에 안장한다.

 

이 외, 수많은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해 묻고 사기그릇에 이름과 순교일을 적어 묘에 함께 묻었다.

 

박 바오로는 아들 박순집 베드로에게 후일 성교회에서 찾을것이니 묘를 잘 보아두라고 일러 두었다.

 

또한 1846/9/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미리내로 이장되기전, 현 용산구 한강로인 왜고개에 안장하기도 했다.

 

박 바오로는 1868/3/23 큰아들 집에서 잡혀 아들내외와 동생과 함께 순교했다.

 

박순집은 25세에 부친처럼 흔련도감이 되어 1866년 병인박해때,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주교, 브르뜨니에르신부, 푸르티에신부와 우세영등이 새남터에서 순교하자 아버지의 뜻을 이어 시신을 수습한다.

 

 

박순집의 일가도 16명이 체포되어 순교하였는데

검거망을 기적적으로 피해 다니며 남은생을 성직자들을 영입하며

보고 들은것을 정리하여 박순집 증언록[현재 절두산성지 순교 기념관에 소장되어 있음]을 엮었다.

 

서울 홍제동에 살던 때, 1888년 샬르트 성 바오로 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하자 셋째 딸을 이 수녀회에 입회하도록 하였는데

그가 곧 최초의 한국인 수녀 가운데 한 사람인 박황월이다.

 

1889년, 한 교우가 제물포로 내려와 전교를 해줄것을 당부하여 전 가족을 데리고 이사를 하고 보니

전교를 청한 교우가정과 또 한가정, 일본인 교우집, 중국인 1명이 전부였다.

 

이런 상황에서 설립된 답동 본당의 초대 주임 발렘 신부를 도와 전력을 다해 전교에 힘쓴다.

 

박순집 베드로는 1911/6/27 82세 나이로 선종했는데

방안에 향기가 풍겨 장손 요셉이 밖에 나가 지붕을 올려보자, 동쪽으로 뻗친 광채가 쌍무지개 같았다고 한다.

 

온통 불빛에 싸여있는 박 베드로의 집에 불이 난줄알고 동네사람이 몰려 갔으나

집은 타지않고 광채만 있어 주위를 살피니 박 베드로가 선종하면서 나타난 서기였다고한다.

 

그래서 모두들 무릎을 꿇고 박 베드로가 성인이 되었다고 칭송하였다.

 

그가 평신도 사도직을 충실히 수행하며 살았던 20년은 오늘날 인천교구 발전에 초석이 되었다.

 

2001/5/24 인천교구에서 순교자 현양정신을 함양하기위해

서울 절두산에 천묘된 박 베드로의 유해를 인천 도화동 성당내에 천묘했다가 같은해 순교자 성월에, 강화 갑곶순교성지에 천묘하여 오늘에 이른다.

 

 

 

 

강화대교

 

 

 

 

 

강화도와 갑곶순교성지          

 

강화도가 천주교와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839년 기해교난을 겪으면서였다.    

박해가 시작되면서 그동안 천주교 신앙이 유입될 때 이용되던 육로 통행이 여의치 않게 되자,    

적당한 해로를 찾게 되는데, 이로 인해 한강과 맞닿아 있는 강화도 연안 뱃길이 중요하게 대두 되었다.    

   

특히 김대건 신부는 선교사를 입국시키기 위한 해로를 개척하려고 서울 마포를 떠나 이곳 강화 갑곶 앞바다까지 왔으며,    

그 후 연평도,백령도를 거쳐 순위도 등산진에서 1846년에 체포된다.    

그 뒤에도 이 강화 갑곶해안은 선교사들이 해로로 입경하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통로가 되었다

 

갑곶에서 순교한 박상손, 우윤집, 최순복 순교자의 3위비

순교당시 처형했던 돌판에 붉게 물든 피빛이 아직도 남아있다.

 

세 분이 처형된 장소이며, 이 곳은 풀이 자라지 않는 토양이 되었다고 함...

 

1871년에 이곳 갑곶에서 직접적인 순교사건이 일어났다.    

 

강화도 해역에 미국함대 4척이 나타나,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불탄 사건의 책임을 물어 통상을 요구했으나,     

대원군이 이를 거절하게 되면서 군사적 충돌이 빚어진 것이다(신미양요).     

 

이 사건으로 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더욱 심하게 천주교를 박해하였다.    

그 결과 기록상 제물진두(현재 화수동성당 주변)에서 여섯 분이,    

이곳 갑곶진두에서는 세 분이 순교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갑곶에서 순교하신 분은 박상손, 우윤집, 최순복 세 분이다.    

 

사연인 즉, 미국 군함이 물러간 이후,    

같은 해 5월 29일(양력 7월16일) 고종은 더욱 철저하게 천주교인을 잡아    

처벌하라는 내용의 교서를 좌우 포도대장에게 내리게 되었고,    

이때에 미국 군함에 몰래 찾아간 일이 있었다는 죄로 이 세 분이 효수된 것이다.

 

 

 

 

 

묵주기도의 길을 떠나며...

 

 미련이 남아 고통의 길이요,

끝이 없을것 같아 고통의 신비요,

영광이 주이지지 않아보여 고통의 신비요,

편치 않기에 고통의 신비입니다.

 그러나,

끝이 있음을, 길은 영광의 신비로 이어짐을 믿고 길을 떠나려 합니다.

 

 열매와 꽃만을 바라는 저에게 잎과 뿌리를 볼 줄 알게 하소서.....

 

 

올들어 강화도를 4번이나 다녀왔다.

봄엔 고려산 진달래를 보러  홀로...

여름엔 가족들과 나들이를 2번 했고, 이번엔 성지 순례 차,..

 

갑곶성지 또한 이번이 3번째 방문이다.

순교 정신의 길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