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덕수궁 나들이... 2014, 11, 14

2014. 11. 16. 17:42서울

임란으로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타 없어지자 선조는 왕족들과 고관들의 자택이 있던 덕수궁 터에 임시로 거처하는 행궁으로 삼았다가 1611년 광해군이 재건한 창덕궁으로 어가를 옮기면서 덕수궁은 별궁인, 경운궁이 되었다.

 

1897년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경운궁을 대한제국의 으뜸 궁궐로 삼아 많은 전각들과, 근대화를 향한 서양식 건물을 세웠다.

 

1907년 고종이 퇴위하면서 궁의 이름을 '덕수궁'으로 바꾸었으며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궁역이 축소되었다.

고종이 승하한 후에는 북쪽 선원전과 서쪽 증명전 일대도 매각되어 원래 넓이의 3/1만 남게 되었다.

 

현재는 중심부인 중화전 일원과 정관헌, 석조전과 같은 양관만 남아 있다.

대한문

 

덕수궁의 원래 정문은 남쪽의 인화문이었는데 궁궐 동쪽이 도심의 중심이 되자 대안문을 정문으로 삼았다.

1906년 한양이 창대해진다는 뜻으로 '대한문'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11시, 2시, 4시에 수문장 교대식이 있다.

함녕전 일원에 속해있는 건물...

덕홍전

 

고위관료와 외교 사절을 접견하던 곳

1911년 건립했으며 외부는 전통 양식, 내부는 샹들리에를 설치해 동서양의 건축미를 살렸음

잡귀를 물리친다는 잡상

함녕전과 마당

 

함녕전은 고종이 거처하시던 곳

정관헌

 

고종께서 차를 마시며 음악을 즐겨 들었다는 서양식 건줄

덕수궁 돌담장과 단풍

철모르고 핀 고궁의 진달래

석조전

 

고종이 침전 겸, 편전으로 사용하려고 지은 집.

영국인 건축가에 의해 1910년에 왼공한 이오니아식 기둥과 삼각형의 박공 지붕, 건물 전면과 동서 양면에 베란다를 설치한것이 특이하다.

 

후에 미술관으로 사용했고 1938년 서[西]관을 증축하면서 서양식 분수 정원도 조성했다.

즉조당[중간 왼쪽]과 석어당[오른쪽 2층으로 된 건물]

 

'즉조당'은 인조와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곳이고, '석어당'은 선조께서 거처하시다 승하한 유서깊은 건물이다.

가장 왼쪽 건물은 '준명당'으로 고종이 업무를 보던 편전이며 즉조당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석어당은 현존 유일의 목조 2층집으로 단청을 입히지않아 소박한 살림집 스타일이다.

석어당

 

중화전

 

덕수궁의 정전으로 왕의 즉위식 , 조례, 외국 사신 접견등 주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뤘던 곳이다.

1902년 지어질 당시엔 중층이었으나 1904년 화재로 소실된 이후, 1906년에 단층으로 중건되었다.

중화전 내부

 

사람의 한 길 정도의 높이로 단을 쌓고 그 위에 용상이 있으며 나무 병풍-삼곡병이 용상을 감싸고 있다.

용상 뒤에 일월오봉병이 그려진 병풍이 놓여져있고 머리위 쪽에 닫집이 설치되어있다.

 

다른 궁궐과는 다르게 중화전엔 임금이 앉았던 자리 뒷편에 감추어진 문이 있다.

천장엔 발톱이 5개인 황금빛 오[五]조룡 한쌍이 위엄한 황권을 나타내고 있다.

중화전에서 본 중화문

 

박석이 깔린 조정이 펼쳐져 있으며 가운데 어도를 사이에 두고 양 옆에 품계석이 나열되어 있다.

중화문에서 본 중화전

중화전 답도

왕이 탄 가마가 오르던 길.

 

중화문과 안 쪽 중화전의 모습

노란 은행나무 단풍과 어우러진 중화전

덕수궁 돌담길과 단풍

관람을 끝내고 대한문을 나서기전, 금천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