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화성, 요당리 성지... 2019, 05, 26

2019. 5. 30. 19:56성지.성당

요당리[蓼塘]는 여뀌 蓼[요]와 못 塘[당]으로

습지식물 인, 여뀌가 많이 자생하는 물가의 마을이었다고 한다.


아산 방조제와 남양방조제로 막혀 있는 이곳은 실제 조선 후기까지

서해의 바닷물과 고잔저수지를 거쳐 습지가 형성되서 생긴 지명으로 전해진다.


이 곳은 느지지라는 이름도 있었는데

지형이 넓은 의미라고 한다.


요당리 성지 전경


요당리 성지는

복음 전파 시기가 확실치가 않다고 한다.


 신유박해(1801년)를 기점으로

서울과 충청도 내포 등지의 신자들이 피난하면서 형성된 교우촌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렇게 형성되어 양간공소라 불리며

갓등이(현재의 왕림)와 은이공소(현재의 양지)와 깊이 연계되어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였다.


바닷물이 유입되어 뱃길이 열렸던 이곳의 지리적 특성상,

충청도와 경기도 내륙, 서울을 잇는 선교 루트의 교두보 역할을 하였던 곳으로[추정]

기해년 (1839년)과 병인년 (1866년)에 일어난 두 번의 박해를 통해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한 신앙의 요람지였다. 

이곳에는 장주기(요셉, 1803-1866) 성인과

125위 시복 추진자 인, 장 토마스(1815-1866)의 출생지이자 신앙의 터전이었고,

이곳 출신 순교자로서 지 타대오, 림 베드로, 조명오 베드로, 홍원여 가를로가 있다.


 그리고 장주기(요셉) 성인의 친인척이자

이곳 출신 순교자로 추정되는 장경언, 장치선, 장한여, 장요한, 방씨 등이 있다. 

교회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전답이 운영되었던 곳으로

그 책임을 맡았다가 순교한 민극가(스테파노, 1787-1840)성인과

이곳에서 공소회장을 맡았던 정화경(안드레아, 1808-1840) 성인께서 활동했던 곳이다.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피신했다가 순교한 앵베르 범(라우렌시오, 1796-1839) 성인과

이분의 피신을 돕다가 순교한 손경서(안드레아, 1799-1839) 성인의 얼이 서려 있는 곳이다. 


 그러나

요당리 성지는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장주기(요셉) 성인의 출생지이고,

예전부터 교우촌이 형성되어 있었던 곳이라는 정도로 치부되어 많은 이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었다.


이러한 점을 안타깝게 여겼던 최덕기(바오로) 주교는

2006년 9월 26일 성지 전담 사제를 파견함으로써

성지개발에 대한 의지를 대내외적으로 천명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미사시간

화~일 오전 11시



대성당


대성당 성전 앞 성모님


대성당 내부

성체를 모신 감실이 제대 앞쪽에 있는게 특이하다.


성당 앞, 조형물


성전 건립과 성지 개발을 위해 써달라고 적지않은 금액을 후원한

방윤순 마리아님의 마음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상이다.


성인 장주기 요셉의 성상


성인은 1866년 3월 30일

충청도 보령의 고마 수영에서 다블류 주교등 4명과 함께 참수 치명하였다.


소성당


소성당 앞 성모님


소성당 내부


양 옆, 십자가의 길 조형물은

1998년 2월에 서울 약현성당의 화재 때, 뜯어낸 목재로

야외 십자가의 길 조형물과 똑같이 만들었다고 함.


이효주 아녜스 조각가의 작품


성인 묘지


성 장주기 요셉,

성 민극가 스테파노,

성 정화경 안드레어,

성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장 토마스

그 외, 순교자들의 무덤이다.


위 네분은

1925년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념해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 되었다.


묵주기도 시작


이 곳 신자들이 숨어 들어와 옹기를 구워 팔아 연명하던것을 묵주알로 상징했다고 함.


대형 십자가와 성모님


성모님과 성모님께 매달린 어린 예수님


성지 전경


십자가의 길 시작


지칭개[성지에서 본 유일한 꽃]


성지 전경

넓은 잔디밭은 기도의 광장이다.


나오는 길에 다시 본 성모님


성지입구 간판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