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 수리산의 최경환 성지... 2019, 03, 09

2019. 3. 15. 07:34성지.성당


수리산성지는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이 잠들어 있는 성지(聖地)이며 옛교우촌이다.

 [과거엔 과천, 현재는 안양]


기해박해(1839년) 때

천주교인들이 숨어 들어와 담배밭을 일구며 신앙 공동체를 이룬 교우촌[담베촌]이었다.


이 마을을 유서깊은 교우촌으로 개척한 사람이 바로 최경환 프란치스꼬 성인이다. 




수리산 성지 성당의 전경

 

지붕 삽자가와, 건물 상단을 돌며 박혀있는 십자가 돌문양[사진엔 보이지않음]은 신앙을 의미하며

외장의 적조는 순교자들의 피를 상징한다.


최경환 프란시스코 성인의 흉상

 

최경환 성인

최양업 신부(우리나라 2번째 사제)의 아버지로 1804년 충청도 홍주(현 홍성)에서 태어났으며

박해를 피해 고향을 떠나 서울의 벙거지골[현, 회현동], 강원도 금성, 경기도 부평 등지로 옮겨 다니다가 정착한 곳이

이곳 수리산 골짜기로, 산을 일구어 담배를 재배하며 신앙생활을 지켜나갔다.

 

그러나 기해박해의 거센 물결이 이 마을에도 밀려 와 

1839년 7월 31일 성인을 비롯한 40명의 교우들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으며,

성인은 40여일의 고문 끝에 포도청에서 숨을 거뒀고(9월 12일),

그의 처, 이성례 마리아는 다른 여교우 한 명과 함께 이튿날 수구문 밖에서 처형당하였다.

 

이보다 훨씬 전에 최경환의 막내아들인 젖먹이도 옥에서 죽었다.

 

최경환의 맏형인 최 야고보가 동생의 시신을 수습하여 생전에 그가 살던 수리산의 마을 옆에 묻어주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그의 무덤은 세인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져갔는데

1929년 용산 신학교의 피숑(Pichon, 宋) 신부의 노력으로 그의 무덤이 확인되었고,

     그의 유해는 이듬해 5월 26일 명동성당으로 옮겨졌다. (현재는 절두산 성지).


수리산 성지는 전대사[赦] 지정 성지이다.


본당 내부


 천정은 목재로, 바닥은 온돌마루로 처리하였으며 감실은 성체현시를 겸하고 있다.


본당 건너편에 최양업 사제의 모친, '복녀 이성례 마리아'의 집이 있다.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 1805-1839) 성인이

다섯아들과 함께 생활한 집터이다. [본당 근처]

                       

빈터만 남아있던 성인의 생가터에

2006년 6월 4일 고택을 완공하여 내부에 작은 성당을 마련하여 매일 성인과 그가족을 기리며 미사를 봉헌하고있다


고택 옆, 두 분[최경환 성인과 그의 아내, 복녀 이성례 마리아]의 그림이 걸려있다.


고택 뒤편의 바뇌의 성모상


1933년 1월 15일~ 3월 2일 사이에

벨기에 고원지대 '바뇌'에서 당시 12살이던 마리에뜨에게 8번을 발현하였다.

 

오늘날 물질적인 삶으로 인해 상실된 신앙의 회복을 위해 가난과 기도의 삶을 가르쳤다.


고택성당의 내부




성인의 무덤으로 오르는 길의 십자가의 길 14처 중...


제 2처


제 3처부터 제10처까지 생략


제 11처, 십자가에 못박힘과

제 12처 십자가에 매달려 숨을 거두심...

제 13, 14처 생략.


부활


야외 미사터와 제대


최경환 성인의 묘


1839년 9월 12일 순교 후,

성인의 시신은 여러번의 장소를 옮기는 어려움 끝에 성인의 둘째 형인 영겸씨 부자가 이곳 수리산에 안장하였다.

 
1984년 5월 6일 시성식에 즈음하여 성인의 묘역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성인이 묘역 약간 위쪽에 모셔진 성모님


성인의 시성 3주년과 성모성년 개막 기념으로

성인의 묘역 옆에 석동굴을 만들고 여기에 성모상을 모셨다.[1987년 6월 7일에]

 

성모 석동굴은 최경환 성인의 직계 후손들에 의해 마련된 것으로 

프랑스 루르드 성모동굴을 본따 성모상 아래에 샘물을 만들었고 동굴 앞에 성녀 벨라 뎃다상을 세웠다.


수리산 성지로 가는 길과 문둥바위


문둥바위의 유래는 이곳에 실제 문둥이들이 살았다는 설이 있고

담배촌에 사는 교우들이 외부의 접근을 피하기 위해 헛소문을 냈다는 설이 있다.

 

옛교우들이 이 바위를 지나 고염나무[수령 100년, 현재는 남아있지 않음]가 보이면

무사히 집에 왔구나 하고 안심했다고 한다.


원래는 개울까지 큰 바위여서 수레가 겨우 지나갈 정도였는데

일제 때는, 아름드리 벌목으로, 6.25 이후엔 미군부대가 들어 오면서

바위를 깍아 점점 작아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