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휘원永徽園과 숭인원崇仁園... 2020, 01, 18,

2020. 1. 19. 23:34서울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에 있는 영휘원永徽園은 

대한제국 1대 고종태황제의 후궁이자 의민황태자(영친왕)의 사친인 순헌황귀비 엄씨의 원소이며,

숭인원崇仁園은 의민황태자(영친왕)의 첫째 아들인 이진 원손의 원소이다.


조선시대 왕족의 무덤은

신분에 따라 이름이 달라 능· 원· 묘로 구분된다.


가장 높은 왕과 왕비, 황제와 황후의 무덤은 능()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빈, 황태자와 황태자비, 왕세손, 왕을 낳은 후궁의 무덤은 원()이라 했다.


나머지 왕족의 무덤은 보통 사람처럼 묘()라고 불렸다.



영휘원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 이야기

순헌황귀비 엄씨(재세 : 1854년 ~ 1911년 양력 7월 20일)는

본관이 영월인 증 찬성 엄진삼의 딸로 1854년(철종 5)에 태어났다.


5살의 나이에 궁녀로 입궁하여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아 시위상궁이 되었다.

     그러나 1885년(고종 22) 32세때 고종의 승은을 입게 되자 명성황후의 진노를 사 강체출궁을 당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 된 후 고종의 명으로 다시 입궁하여 고종의 후궁이 되었다. 


조선의 국모를 살해할 정도로 거칠어진 일본의 압박에 고종은 매우 불안해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때 상궁이었던 황귀비는 며칠 동안 가마 2채로 궁을 출입하며 일본의 감시를 느슨하게 한 뒤

고종과 왕세자 순종을 가마에 태워 러시아공관으로 탈출시킨다.


치밀하고 대담하게 진행된

이 ‘아관파천’을 통해 황귀비의 성격과 지혜를 다소 짐작해 볼 수 있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 된 후에 황태자(영친왕)를 낳았으며,

이후 귀인(貴人), 순빈, 순비를 거쳐 1903년(광무 7)에 황귀비로 책봉되었다.


엄씨는 우리나라의 교육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특히 여성의 신교육을 위해 진명여학교와 명신(숙명)여학교를 설립하였고,

양정의숙(양정중고교)이 재정난에 허덕이자 땅 200만 평과 내탕금을 기증하는 등

나라를 짊어지고 나갈 인재를 키우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경술국치 후 1911년에 덕수궁 즉조당에서 58세로 세상을 떠나

시호를 순헌(純獻) 궁호를 덕안궁(德安宮), 원호를 영휘원(永徽園)이라 하였다.



숭인원은

의민황태자(영친왕)의 첫째 아들인 이진 원손의 원소이다. 원소의 구성은 영휘원과 비슷하다.

 


이진 원손(재세 : 1921년 양력 8월 18일 ~ 1922년 양력 5월 11일)은

의민황태자(영친왕)과 황태자비 이씨(방자)의 첫째 아들로 일본에서 태어났다.


1922년에 황태자와 함께 일시 귀국하였다가 일본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인

1922년 5월 11일에 덕수궁 석조전에서 급사하였다.


배앓이로 죽었다는 공식발표와 함께

아기의 입에서 검은 물이 흘러나왔다는 독살설이 널리 퍼지기도 하였다.

 

순종황제는 원손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후하게 장례를 치르도록 명을 내렸다.



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