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대 궁궐 중 발길이 뜸한 곳, 경희궁[慶熙宮]이야기 ...2021, 02, 13

2021. 2. 17. 19:51서울

서울에 있는 조선시대 대표 문화 유적지로 5대 궁궐과, 종묘. 사직단을 들수 있다.

5대 궁궐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을 둘수 있는데

유독 관심밖으로 밀려나 있는 궁궐 인, 경희궁을 다녀왔다.

 

광해군은

1617년[광해군9]부터 1623년[광해군15]에 걸쳐 경희궁을 완성했다.

 

동궐 인, 창덕궁을 흉궁이라 여겨 길지에 새궁을 세우고자 하여 인왕산 아래 인경궁을 창건하였으나

정원군[인조의 생부]의 옛집에 왕기가 서렸다는 술사의 말을 듣고

그 자리에 궁을 세워 경덕궁이라 이름 지었다가 영조 때 와서 경희궁이라 불렀다.

 

그러나,

광해군은 정작 이 궁에 들지도 못한채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나고

정원군의 장남에게 이어졌으니 그가 곧 인조이다.

결국은 왕기가 서린 집이었다.

 

인조가 1624년 제 16대 왕으로 즉위할때

창덕궁과 창경궁은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으로 모두 불타 버렸기 때문에

인조는 이곳에서 정사를 보기 시작하여 1865년[고종 2] 경복궁 복원 前까지

이궁으로 동궐 인, 창덕궁과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서궐로 자리매김한다.

 

경희궁에 머문 왕들은 인조에서 철종까지 열[10]분이나 되고

창덕궁과 경복궁이 복구 된 뒤에도 경덕궁[경희궁]에 머물기도 했다.

 

경희궁에서 탄생하신 왕은, 제19대 숙종. 제 20대 경종.

승하는, 제19대 숙종, 제 21대 영조, 제23대 순조.

즉위는, 제20대 경종, 제22대 정조, 제 24대 헌종.

관례는, 1625년 소현세자.

가례는, 제 16대 숙종, 제 24대 헌종이 치렀으며

인현왕후[숙종 계비], 희빈 장씨[숙종의 비, 경종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사도세자의 비, 정조의 어머니]도 경희궁에 살았던 대표적 인물이다.

 

경희궁도 창덕궁처럼 대지의 형세를 반영한 특이한 형태의 궁궐이다.

정문 인, 흥화문[興化門]은 남향이 아닌, 동향을 하고 있다.

 

경희궁은 정전 인, 숭정전을 비롯하여 편전 인, 자정전. 침전 인, 융복전. 회상전등 100여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었으나

고종 때,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경희궁의 있던 상당수의 건물을 옮겨 갔으며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면서 본격적인 수난을 맞이 하였다.

 

1910년 일본인 학교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숭정전 등, 경희궁에 남아 있던 중요한 전각들이 헐려 나갔고

면적도 절반 정도로 축소되어 궁궐의 모습을 잃어 버렸다.

 

서울시는 1987년부터 경희궁지에 대한 발굴을 거쳐

숭정전, 자정전, 태령전 세 전각만을 복원해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1980년 9월 16일 사적 제 271호로 지정 되었다.

 

흥화문, 흥화문도 여느 궁궐처럼 가운데 화[化]를 넣어 백성을 정신적으로 가르치고 이끌어 감화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흥화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것이 승정문인데 이 앞에 있던 금천교는 서울 역사박물관의 동쪽 입구가 되어 버렸다고 한다.
가까이 본 승정문
승정전, 경희궁의 정전으로 경희궁 창건당시 지어졌다. 국왕이 조회를 하거나 공식행사가 치뤄지던곳. 경종, 정조, 헌종 등 세 임금의 즉위식이 있던 곳이다. 현재 이 건물은 복원한 것이고 원래 승정전은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쓰이고 있다.
답도 (踏道) , 궁궐에서 임금이 가마를 타고 지나가는 계단. 픙계 가운데는 봉황과 용을 새겨 넣는데 또 한가지 명협이라는 상서로은 서초를 새겨 넣어 임금의 덕망과 위신력을 칭송하는것이라 한다. 명협은 초하룻날부터 매일 한 잎씩 나서 자라고 16일째부터 매일 한 잎씩 져서 그믐에 이른다고 한다. 이것을 보고 달력을 만들었다고 하며, 이로부터 '역초( 曆草 )'라는 말이 생겨났다.
명협문양
승정전 내부, 중앙에 임금이 앉는 용상이 있고 뒤에 일월오봉도가 펼쳐져 있다. 천정에는 두마리의 용이 금빛으로 그려져 있다. 앞쪽 두개의 깃대 중 오른쪽은 수정장, 왼쪽은 금월부라고 한다.
편전 인, 자정전으로 들어가는 문
자정전, 편전으로 임금의 공무수행 공간. 숙종이 승하하신 후에는 빈전으로 사용되다가 선왕들의 어진이나 위패를 임시로 보관하기도 했던 곳으로 1908~1910년 사이에 전각들이 훼손 될때 헐렸다가 경희궁지 발굴을 통해 복원 되었다. 문살 밑부분은 창호지를 붙이지 않았다. 관람객들이 들여다 보느라 뚫어서 일부러 그렇게 놔뒀다고 함.
경희궁 맨 위쪽에 자리한 태령전, 영조 당시에 중수되어 영조의 어진을 봉안하였고 영조가 붕어한 후 혼전으로 사용되었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전각이었으나 일제가 남은 전각 5개를 매각했다가 해방 후 발굴해 2000년도에 복원 했다. 복원후에는 영조의 진전이었던 점을 감안해 영조의 어진 모사본을 보관하고 있다.
서암[瑞巖]. 태령전 뒤로 특별한 모양의 바위가 있는데 바위속에 암천이 있어 경희궁의 명물이었다고 한다. 본래는 왕의 기운이 서렸다고 해서 왕암으로 불렀는데 그 이름 때문에 광해군이 이곳에 경희궁을 지었다는 설이 있다.
서암에서 본 전각들...
관람을 마치고 나오다가 굴곡이 심한 노거수를 만났다. 종로구의 아름다운 나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는데 저러고도 살아 있는게 신기하다. 경희궁의 위엄과 영화와 쇠락, 일제의 잔망까지 역사를 온 몸으로 토해내는것 같아 마음이 짠했다.
경희궁에서 나오는 길 왼편, 서울 역사 박물관 주차장 한쪽 구석에 있는 방공호.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 초 일제가 미군 폭격에 대비해 만든 것이다. 길이 110여m에 폭 9m, 높이 6m 정도의 규모로, 내부는 20개 남짓한 크고 작은 방들로 구성돼 있다. 특히 콘크리트 외벽의 두께는 자그마치 3m나 된다. 관람 신청 후, 해설사와 함께 내부를 볼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