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옛 중심사찰이었던, 개원사[開元寺]... 2017, 03, 13

2017. 3. 15. 22:52남한산성의 풍경과 꽃

개원사는 인조 2년 [1624]에

임진왜란으로 파손된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남한산성에 원래 있었던 망월사 옥정사 이외에 7사를 창건하였는데

개원사를 본영 사찰로 활용하고 나머지 7사는 각도의 승병이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조선 승병의 총지휘소로 각광받았던 사찰이다.

[남한산성에는 망월사, 개원사, 장경사, 동림사, 옥정사, 국청사, 한흥사, 남단사, 천주사가 있었다.]

 

그 후, 고종 3년[1894] 갑오경장 때,

의승 방번이 폐지될때까지 370년간 수도 한양을 지켜온 호국 사찰로 번창했으며

전국 사원들의 승풍을 규찰하는 규정소가 설치되어 명실상부하게 조선 불교의 총본산 역할도 담당하게 되었다.

 

이곳에는

인조 16년 이래 [1637] 대장경이 보관되어 있었으나 1970년 화재 발생때 법당 누각 등의 부속건물과 함께 전소되었다.

 

그후 작은 건물 1동이 겨우 남아 있었으나

선효화상이 신도들과 함께 10여년간에 걸친 원력끝에 대각전, 요사등의 건물을 신축 한 후 면모가 일신되기에 이르렀다.

 

현재

군기고지 누각지 종각지 등에는 주춧돌 석계박석등이 남아 있어 옛 개원사의 규모와 건물 배치를 짐작케 한다.

 

또한 이 사찰에는 남한산성 축성과 산성 수호 승군들이 사용했던

유분 한점과 석장 옹기 함지등의 유물등이 보존되어 있어서 번성했던 사찰릐 영광을 말해주고 있다.

 

경기도 기념물 119호

 

개원사 조계문[일주문]

 

천왕문

 

석불 입상

 

 

 

범종각

 

개원사의 범종각은 2층 누각으로 되어있다.

 

중심전각 대각전

 

5층 석탑

 

전경

 

 

 

 

 

전경

 

 

 

천왕문 안 쪽, 공덕비

 

 

 

(설화)

 

개원사는 옛날부터 불경을 많이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아주 많은 양의 밥을 지을 수 있는 무게가 200근이 넘는 큰 놋동 4개가 있었다고 한다.


인조 때,

한 척의 배가 서울 삼개 나루에 닿았는데 사람은 없고, '중원개원사간'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불경을 담는 궤짝이 실려 있었다.

 

삼개에서 보내온 궤짝과 사연을 들은 인조는

불경 궤짝이 중원의 개원사에서 판각하고 찍은 것이라니, 이는 반드시 인연이 있을것'이라 여겨 서둘러 개원사라는 절을 찾게 한다.

 

인조는 그 불경 궤짝을 귀중하게 잘 싸서 광주 남한산성의 개원사로 보내게 된다.

 

어느 날,

불경궤짝이 잘 보관되던 개원사에 불이 나

전체를 태울 위험에 처하게 되는데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어와 일순간에 불이 꺼져버렸다고 한다.


후에도 다시 한 번 큰불이 그 궤짝을 보관하고 있던 누각에까지 번진 적도 있었는데.

이때도 갑자기 하늘에서 큰비가 불길을 덮쳐 누각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고 한다.

 

두 차례나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자

사람들은 불경 궤짝을 보관하고 있는 개원사를 부처님의 덕을 보고 있는 절이라고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

 

남단사지[南壇寺址]

 

 

남한산성 관련 사찰은 모두 10개가 있는데

이중 남단사등 8개 사찰은 본성내에 동림사는 봉암성내에 영원사는 한봉성 근처에 자리잡고 있으며

남단사는 조선 인조때 남한산성을 축성하면서 함께 건축된 사찰이다.

 

남단사는

남장대를 중심으로 남옹성을 방어하며 남한산성 동남쪽이 방어선을 형성하던 곳이다.

 

또한

남한산성 수축 당시 승군의 숙식과 훈련을 할수 있는 군막 사찰의 역활을 한것으로 보인다.

 

승군은 고종때까지 유지되었고

1907년 일제가 항일 의병활동을 위해 사찰에서 보관하던 무기와 화약을 수거하면서 사찰도 함께 파괴하였다.

 

남단사에 관한

특별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주춧돌을 보면 규모가 상당히 큰 사찰이었음을 알수 있다.

 

청노루귀 개화 상태[3월 13일]

8일전과 별 차이가 없다.

 

 

 

앉은부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