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손골 성지... 2017, 06, 17

2017. 6. 21. 16:42성지.성당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손골은

예로부터 향기로운 풀이 많고 난초가 무성하여 ‘향기로운 골짜기’라는 뜻의 손곡()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손골은

주민들 사이에서 천주교 신자들의 마을, 즉 ‘성교촌()’이라고 불렸는데,

이요한과 그의 아들 베드로, 손자 프란치스코 삼대는 손골에서 지내다 병인박해 때 피신하였다가 1871년에 순교하였다.

특히

프랑스 출신, 聖 도리 헨리코(Dorie, Pierre Henricus) 신부는 1865년 조선에 입국하여

손골에서 선교 활동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27세로 순교하였다.


그 후

도리 신부는 1984년 교황 요한바오로 2세에 의해서 시성됨으로써 한국 순교 성인 103위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손골성지에

천주교 신자들의 집단 거주지가 형성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839년 기해박해를 피해 숨어든 신자들이 교우촌을 이루었으며,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손골에는 그 수가 12가구의 교우들만 살았다고 한다.


손골은 박해가 극심한 시기에

 활동에 앞서, 안전하게 적응하기 위해 파리 외방선교사들이 언어와 풍습을 익히면서 선교하기 위한 준비를 하던 곳이었다.


병인박해 때, 도리 성인은

손골의 신자들을 모두 외부로 내보내고 홀로 남아있다 체포됐다.


성당 뒤편에 안장된 무명 순교자들도 손골의 신자들이다.


손골 성지 본당


대형 십자가


성모상


순교자의 길


 

성 도리신부는 1839년 9월 23일

프랑스 '탈몽'에서 태어나 파리외방 전교회에 입회하여 1864년 5월21일 사제가 되었고 이듬해 인, 1865년 5월 27일 조선 선교사로 충남 내포지방[현 삽교]으로 입국한다.


6월 23일 조선대리감목구장 베르뇌 주교의 명에 따라 손골에 머물며 우리나라 말과 풍습을 익혔다.


병인박해 때인, 1866년 2 22 손골에서 체포되었고 3월 7일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입국한지 8개월만이며 당시 27세였다.

 

오메트로 신부는 1837년4월8일

프랑스 '에젝'에서 태어나 1862년6월14일 사제가 되어 조선 선교사로 1863년 6월 23일 입국한다.

 

그 해

6월 말부터 손골에 머물며 말과 풍습을 익히고 이듬해 성령강림 대축일에 베르뇌 주교로부터 정식발령을 받아 손골과 미리내 주변에서 사목활동을 하다 풍토병에 시달린다.


완쾌후 11월부터 다시 활동하던중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3월 11일 자수하여 30일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한다.

 

입국한지 9개월 만이다. 당시 29세였다.





聖 도리 헨리코 神父상



聖 오메트로 神父





본당 내부


본당 입구,

 

위 쪽은 종탑으로 낮12시에 종을 울린다.



본당 지하에 마련 된 순교자의 방


무명순교자들의 묘 전경




장미


피정의집 뜰에서 본 전경


십자가의 길 14처


십자가의 길 중에 제 4처


[본당 신부님이 십자가의 길 14처를 봉헌하던 중,

향과 성수를 뿌리며 문헌에도 기록이 없는 이곳에서 나온 무명 순교자들에 대해 의심이 들었는데

제 4처 축성 중에 무지개가 피어 올라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하여 클로즈업 해보았다.]


예수 성심상


도리 신부 현양비


도리 신부를 기념하는 이 현양비를

처음엔 10단으로 만들었다가 병인박해 24위 순교자들이 시복되면서 18단이 되었다.

그 후

103위 성인이 탄생되면서 다른 모습이었다가, 2016년 도리 신부 순교 150주년에 원형대로 복원되었다.


맨 꼭대기에는

농부였던 도리 신부의 부친이 사용하던 맷돌을 똑같은 십자가 모양으로 2개를 만들어

하나는 본국에, 하나는 손골로 보내져 도리신부 현양비 꼭대기에 올려져 있다.


맷돌의 변화 돌 십자가


화단에 화려하게 핀 백합


전경


성 도리 기념관


손골 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