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선운사- 2014, 03, 24

2014. 3. 30. 22:36전라도


천연 기념물[제 367호]인 송악


 

송악은

늘 푸른 덩굴식물로 줄기에서 뿌리가 나와 암석 또는 다른 나무 위에 붙어 자란다.


고창 삼인리 송악은

선운사 입구 개울 건너편 절벽 아래쪽에 뿌리를 박고 절벽을 온통 뒤덮고 올라가면서 자라고 있으며,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으나 크기로 보아 적어도 수 백년은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고창 삼인리 송악은

그 크기가 보기 드물 정도로 크고,

이곳의 송악은 내륙에서 자랄 수 있는 북방한계선에 가까우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선운사 옆으로 흐르는 도솔천은 물빛이 검다.

 

전설에 따르면

큰 이무기가 지키는 거대한 연못이 있었는데 절을 짓기위해 이무기를 쫒아내고 못을 메워가는 도중에 마을에 갑자기 눈병이 돌았다.


그런데

숯을 한가마씩 가져다 연못에 쏟아 붓는 사람은 눈병이 감쪽같이 나았다고 한다.


온 마을 사람들이 숯을 쏟아 붓고 눈병을 고쳤다고 한다.

그때부터 도솔천에 흐르는 물빛이 검다고 한다.

 

그러나

선운사 주변에서 자생하고 있는 참나무류와 떡갈나무 열매, 낙엽류등에서 나오는 타닌성분이 바닥에 침착되어

미관상 그렇게 보일뿐 수질은 전혀 오염되지 않았다고 한다.

 

일주문


 

도솔산에 자리 잡은 선운사는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검단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다른 설로는 검단선사가 평소 친하던 신라의 의운국사와 함께 진흥왕의 시주를 얻어 창건했다고도 한다.

다분히 후대에 형성되었을 창건설화에 따르면,

죽도포(竹島浦)에 돌배가 떠와서 사람들이 끌어올리려 했으나 자꾸 바다 쪽으로 떠나갔다고 한다.

 

소문을 들은 검단선사가 바닷가로 가니 배가 저절로 다가왔다.

배 안에는 삼존불상과 탱화, 나한상, 옥돌부처, 금옷 입은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의 품속에서

“이 배는 인도에서 왔으며 배 안의 부처님을 인연 있는 곳에 모시면 길이 중생을 제도, 이익케 하리라”고 씌어 있는 편지가 나왔다.


검단선사는 본래 연못이던 지금의 절터를 메워 절을 세웠고,

이때 진흥왕은 재물을 내리는 한편, 장정 100명을 보내 공사를 돕고 뒷산의 소나무로 숯을 구워 경비에 보태게 했다.

 

하나의 설화는 또 다른 전설로 이어져, 동불암 마애불 왼쪽 산길 위에 있는 자연석굴은

검단선사가 연못을 메우던 때 쫓겨난 이무기가 다급하게 서해로 도망 가느라고 뚫어놓은 것이라 하여 용문굴이라 불린다.

한편, 절을 세울 당시 선운산 계곡에는 도적들이 들끓었는데

검단선사는 이들을 교화하고 소금 굽는 법을 가르쳐서 생계를 꾸리게 했다.


반성한 도적들이 소금을 구우며 살던 마을을 검단리라고 하며

그들은 해마다 봄 가을에 보은염이라는 이름으로 선운사에 소금을 보냈다고 한다.


실제로 해방 전까지도 그 일대 염전 사람들은 선운사에 소금을 보냈다.

그후

고려 충숙왕 5년(1318)과 공민왕 3년(1354)에 효정선사가 중수했으나 폐찰되었다.

 

조선 성종 14년(1483)에는

행호선사가 쑥대밭이 된 절터에 서 있는 구층석탑을 보고

분발하여 대대적으로 중창했지만 정유재란을 맞아 다시 잿더미가 되었다.


 다시 광해군 5년(1613), 무장현감 송석조가 원준대덕과 함께 3년에 걸쳐 절을 재건한 후 몇 차례의 중수를 거치며 오늘에 이른다.

 

한창 번성하던 시절에는

 89개의 암자를 거느리고 3천여 명의 승려가 머물렀다는 선운사는

지금은 도솔암, 참당암, 석상암, 동운암 등 4개의 암자와 석탑,

그리고 본절 경내에 천왕문, 만세루, 대웅전, 영산전, 관음전, 팔상전, 명부전, 산신각 등 10여 동의 건물을 지니고 있다.


절 안의 주요 불전들은

모두 맞배지붕 집이며 각 건물 전면 간살 사이의 비례도

대웅전의 형식을 따라 동일하게 처리되어 전체적으로 정연하고 차분한 느낌을 준다. - 옮김-

 

 


 


 


 



 

 


 


 


 


 


 


 


 

 


 


 


 


천왕문

 

동백꽃 길

 


남쪽 해안이나 섬에서 주로 자라는 동백나무는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춘백, 추백, 동백으로 불린다.


선운사 동백은 춘백으로 알려져 있다.

 

선운사 동백은 언제 심었는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산불로부터 사찰을 보호하기 위헤 보호림으로 조성하였다고 하며 약 2,000여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선운사 초입 길가.

서정주 시인의 ‘선운사 동구’ 육필원고를 그대로 새긴 ‘미당 시비’가 길손들을 맞이하고 있다.


‘선운산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니다’

 

선운사 동백은 수령이 500년이며

자생지 최북단에 위치해 있는것으로 천연 기념물 제 184호로 지정되어 있다.

 

 


 


 


 


피었을 때 고운 동백꽃은

질 때도 송이째 뚝뚝 떨어져, 가슴을 치는 서운함과 아름다움을 함께 느끼게 한다

 

선운사의 또하나의 명물은

초가을이면 핏빛으로 물들어 피어나는 꽃무릇이다.


도솔천을 끼고 죽 이어진

꽃무릇 잎사귀가 만나지 못할 꽃을 피우기위해 초록으로 수놓아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