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순교 성지를 따라... 2015, 03, 06

2015. 3. 6. 23:49성지.성당

 경기도 광주 지역은 삼국시대 이래 지리적 요충지로서 1595년(조선 선조 28) 남한산성이 축조되었다.

 

1626년(인조 4) 광주 유수의 치소와 마을이 성 안으로 이전되면서 천주교 박해 때마다 신자들이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1791년(정조 15) 조선시대 최초의 천주교도 박해사건인 신해박해 때부터 신자들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다고 전하며,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때는 이곳에서 첫 순교자가 나왔다.

이후 1839년(헌종 5)의 기해박해와 1866년(고종 3)의 병인박해 등을 거치면서 약 300명의 신도들이 참수, 옥사, 장사 등의 형태로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5년 7월 이곳에서 순교한 신자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남한산성 성지개발위원회가 발기한 뒤 1998년 3월 성지개발위원회가 발족하였으며, 1999년 11월 소성당이 완공되었다.

소성당에는 김성우(안토니오)와 최경환(프란치스코) 두 성인의 유해가 있고, 성지순례 미사를 전례할 때 이곳에서 양영성체를 한다.

야외 미사터에는 남한산성 성지를 상징하는 대형 십자가와 돌 제대가 조성되어 있으며, 이곳에서 매년 5월 성모의 밤과 9월 순교자 현양대회를 개최한다.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446번지에 있다.

 

서울등지에서 끌려온 신자들이 투옥되었던 포도청이 있던 자리...

 

감옥은 헐거운 천막과 판자로 이루어진 일종의 오두막 같은 형태로

흙바닥에 엉성한 멍석을 깔아 놓은 외양간이나 창고 같이 지어져 비와 추위를 피하기 어려웠으며 순교자들은 이러한 감옥에 갇혀 있다가 유수나 판관에게 끌려가 신문을 당하고 다시 갇히기를 반복하였고, 그 중에는 20여년이나 감옥 생활을 하다 순교한 사람도 있고 옥사하신 분이 22명이나 되고, 교살형이나 교수형의 경우는 대부분 감옥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감옥 터는 또한 순교 터이기도 하다.

 

음식점에 붙은 표석이 그 자리였다는것을 말해주고 있다.

 

순교자 현양비

순교자 성당 신축 건물

구 건물로 사제관과 찻집이 있다.

굴비처럼 엮인 신자들은 이 곳으로 끌려와 고문과 문초를 당한다.

이곳은 연무관 앞으로 장터였으며 저잣거리이기도 했다. 지금은 자동차들의 왕래가 잦은 찻길을 옆에 두고 있다.

연무관 제승헌

 

연무관은 본래 군사들의 훈련과 무술 시합을 열던 곳이고 제승헌은 판관의 숙소 및 집무실이었으나 유사시에는 남한산성을 근거로 수도 남부를 방위하던 수어청 중군의 본영으로도 사용되었다.

대박해로 인해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체포되어 남한산성으로 끌려오게 되면 수어영의 전영장을 겸하던 판관에 의해 이곳에서 심문을 당하였다.

따라서 연무관은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끝까지 하느님을 증거하던 순교자들의 신앙의 고백 터이며 순교 터이다.

처형을 당한 순교자들은 이 길을 따라 동문 시구문을 통해 버려진다.

동문

 

300여 순교자들의 시신이 버려졌던 시구문[안]

남한산성의 16개 암문 중, 11번째 암문이다.

시구문 [밖]

 

시구문 밖 개울...

시구문 위에서 본 동문과 성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