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왕조시대의 화려한 문명이 전시된 국립 박물관... 2012, 01, 06

2018. 1. 29. 14:35이집트

이집트 카이로 고고학 박물관은

타흐리르 광장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집트 국립 박물관


이집트 7,000년의 역사가 모여 자리 한,  

찬란했던 문명의 집대성인 박물관으로서

이집트의 미술과 고고학적 유물 수집으로는 양과 질 모두 세계 최고이다.

 

19세기초

이집트의 고 미술품이 함부로 해외에 반출되자.

이를 우려한 프랑스 고고학자 A. 마리에 의해 설립되었다.

 

박물관은 처음에

불락지방에 세워졌다가 현재의 자리에 1902년 11월 15일에 개관했다.

 

해마다

150만명 이상이 이 박물관을 찾고, 이 중 이집트인들이 50만 정도라고 한다.



박물관 입구 중앙의 연못에는

파피루스와 연꽃이 자라고 있다.

 

파피루스는 이집트 북부지방[델타지방]의 상징이며,

남쪽지방의 상징은 연꽃 또는 백합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이의 원료가 파피루스이다.


 박물관 내부에서는

전면 사진촬영이 금지되기 때문에 카메라는 가지고 입장 할 수가 없다.

 

아래 사진들은 빌린것으로 이해를 돕기 위해 몇 장만 올려본다.


박물관엔 107개의 전시실이 있는데,

1층에는 거대한 조각상이 있고

상층에는 소규모의 조각상과 보석류 투탕카멘의 유품 미이라가 전시되어 있다.

 

 

 이리 진귀한 보물들을 허술한 창고같은 곳에 보관한다는 인상이 들었는데

대규모의 박물관을 새로 지어 이전 할 계획이라고 한다.

 

실제로 1년 전,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을 향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고 있을 당시,

혼란한 틈을 타 박물관 채광창을 뜯고 보물 18점을 도난해 간 일이 있었다.

 

그 보물들은 돈으로 값을 매길수 없는 13세기의 진귀품들도 있다고 한다.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으며 도둑 역시 오리무중이라고...

박물관 입구의 람세스 2세상


장례의 신 아누비스 상
 
 이집트 고대 신화에나오는 죽은 자의 신으로
죽은 자의 심장을 저울로 달아서 생전의 행위를 판정 한다는 신이다.
 
머리는 자칼이고 몸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다.

BC 2400년경의 세셰스테스 여왕의 미이라


이집트 최초의 여왕인 하셉수트 여왕상


왕족들이 죽어 미이라를 만들때 그들의 내장을 담는 용기들이다.


미이라 전시실


 아게나톤 반신상

 

신앞에 인간은 평등하다며 노예를 해방시켰고 평화를 사랑한 반전 주의자로 알려져 있는 파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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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탕카멘에 대하여...........*
 


 1881년 이집트 정부는 놀라운 정보를 입수했다.

골동상들 사이에
고대 이집트시대 파라오(왕)가 사용하던 파피루스가 나돌고 있다는 것이었다.

카이로 박물관은 테베 서쪽 룩소르 부근에서 파라오들의 무덤군 인,
'왕들의 계곡'을 찾아냈지만 이미 도굴꾼에 의해 모두 파헤쳐져 있었다.

혹시나 했던
미국의 시어도어 데이비스가
이집트 정부의 허가를 얻어 1902년부터 12년동안 네 곳의 무덤을 발굴했지만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채 영국귀족 조지 카나번에게 발굴권을 넘긴다.

카나번과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는
단 하나 드러나지 않은 투탕카멘왕의 무덤을 찾아 꼬박 6년을 헤맨 끝에
22년 11월 람세스 2세와 6세, 메르넵타왕 무덤 사이에서 3천3백년동안 숨겨져 있던 왕의 잠자리를 발견했다.

고대 이집트 18왕조 12대 왕으로 겨우 9년간(BC 1361~1352) 재위한 투탕카멘의 무덤에선
1백10kg짜리 황금 관(棺)과 황금가면(11kg)등 호화찬란한 금은 보화와 합금되지 않은 철,
3천여년 동안 마르지 않은 향료 등 2천여점의 귀중한 유물이 나왔다.

카이로 박물관의 주요 소장품은 대부분 이 곳 발굴품이라고 할 정도다.

그러나
이 엄청난 발견 뒤엔 무슨 일인지 발굴에 관여했던 사람들이 이유없이 사망하는 불행이 잇따랐다.

23년 카나번이 모기에 물려 죽은 걸 시작으로
무덤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 13명이 원인불명의 병이나 자살 등으로 세상을 뜨자
급기야 "투탕카멘의 저주"라는 말이 생겼다.

우연일 뿐이라는 발표에도 불구하고
의문은 가시지 않았고 결국 투탕카멘의 사인(死因)이 큰 관심사로 떠올랐다.

겨우 18살에 죽은데다
발견 당시 미라 보존상태가 나쁘고 뇌에 치명적 손상이 있었다고 발표됐기 때문이다.

당시 이집트가 파라오와 신관의 암투가 심했던 시절이라는 것도
왕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건 아닐까라는 추측을 부채질했다.

얼마전, 또 다시 미국 연구팀이
미라의 X레이 촬영사진 및, 무덤 형태를 정밀분석한 결과 
총리 "야"에 의해 살해된 게 분명하다는 발표가 나왔다.

카터가 관을 열었을 때
투탕카멘 왕은 소담스런 꽃다발 아래 평화로운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고 한다.

꽃다발은 어린 왕비가 죽은 남편 투탕카멘에게 선물한 것인데
오랜 세월 퇴색하긴 했지만 원형은 카이로 박물관에 보관 되어 있다.

3천3백년도 더 지난 지금 사인을 규명한다고 법석을 떠는 후손들에게
소년왕이 과연 고맙다고 할지 아니면 제발 좀 그냥 내버려 두라고 할지 궁금하다.




왕가의 계곡 투탕카멘 무덤에서 발견 된 황금 장식 나무관


어린 나이에 숨진
이집트 제 18왕조 제 12대 왕 인, 투탕카멘의 유물인 황금 마스크는
붕대를 감은 미이라의 얼굴에 파라오 얼굴 모양대로 만들어 씌워져 있었다.
 
얼굴 위에는
어퍼와 로어 이집트의 수호신 인, 대머리 수리와 코브라가 이마위에 조각 되어 있었다.
 

투탕카멘 왕의 내장을 보관하는 용기.
 
룩소르의 왕들의 계곡 무덤군, 투탕카멘 왕의 무덤에서 발굴 되었다.

투탕카멘이 죽은후 미라를 만들때 내장들을 꺼내어 네개로 분류해 담은 알라바스터 용기이다.

조각 된
이집트 여신들이 보호하고 있는 사각의 상자 안에 4개의 투탕카멘 얼굴을 한 내장 용기가 있다.


황금 마스크가 들어 있던 관의 내부


미이라를 보호 하는 관으로 '영혼이 머무는 집'이라고 불렀다.

 

발판이있는 투탕카멘의 옥좌...

 

어린 투탕카멘 부부는 금슬이 좋았다고 전해진다.

황금을 입힌 옥좌 등받이에는 부부의 금슬을 뜻하는 금박 그림이 그려져 있다.

 

관람을 끝내고 나와서 담은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