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예루살렘 '통곡의 벽'... 2012, 01, 12

2018. 1. 31. 11:06이스라엘

오늘은 '구 예루살렘' 순례 일정을 끝으로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가기 때문에
2일간 머무른 호텔에서 짐을 챙겨 버스에 오른다.
 
간밤엔 호텔측에 항의하는 바람에 약간 따뜻하게 잘수 있었다.
물론 시차 적응도 된 듯 하다.
 

호텔 로비에

넓게 퍼져 들어오는 아침 햇살은 눈 부시지만 강한 바람에 바깥 기온은 제법 춥다.


오늘 첫 일정은
예루살렘 구 시가지의 '통곡의 벽'으로 이 곳은 간단한 검색을 통해 입장을 한다.
 
예루살렘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유대교의 성지이다.
세 종교 모두 뿌리는 같지만, 서로 긴장하고 대립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뜻이라고 한다.


통곡의 벽엔
남녀가 각각 다른 통로로 입장을 하게 되는데 칸막이를 중심으로 왼쪽은 남자가 오른쪽은 여자가 입장한다.

남녀가 각각 입장하는 두 지역 중, 이 곳은 여성만이 들어 오는 남쪽 부분에 해당 된다.
 
구 예루살렘의 성벽인, 서쪽 벽(통곡의 벽)은
서기 70년 로마인들에게 파괴된 예루살렘 제2성전 가운데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유적지이자, 마지막 유적지이기 때문에
비잔틴 시대부터 지금까지 유대인들의 희망과 순례의 중심이 되고 있다.
(유대인들에게 민족의 단결 및 구원의 상징으로 비추어지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
 
오스만 터키 시대부터 이스라엘은 물론
전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이곳에 와서 소원이 적힌 쪽지를 벽의 틈새에 끼워 가며 기도를 한다.
 
오늘날 이 벽은 
691년 이슬람 교도들이 세운 '바위 돔 사원'과 '알 아크사 모스크' 를 둘러 싼 담벽과 마주하는 일부 성벽으로
1948년 이스라엘 독립시엔 '요르단'의 관할이었다가 1967년 6일 전쟁 때,
옛 예루살렘 시를 점령하므로써 1800년만에 처음으로 예루살렘 전체를 유대인들이 관할하게 되었다.
 
이 유적지의 신빙성은 전승, 역사, 고고학 등으로 확증되어 왔다.
오늘날의 모습은 길이 50미터, 높이 18미터 가량 되지만 땅속으로 훨씬 더 깊이 들어가 있다.

1928년 9월에
일부 유대 교도가 지금까지의 관례를 깨고 멋대로 벤치나 막을 가져왔기 때문에,
29년에는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이 아랍의 분쟁이 되어 다수의 사상자를 내고, 성지 문제를 둘러싼 분쟁의 발화점이 되었다.

 

'통곡의 벽'이라 이름 붙여진 유래는, 

예수가 죽은 뒤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많은 유대인을 죽였는데,

이같은 비극을 지켜 본 성벽이 밤이 되면 통탄의 눈물을 흘렸다는 설과, 

유대인들이 성벽 앞에 모여 성전이 파괴된 것을 슬퍼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예루살렘이 이스라엘과 요르단으로 분할되면서 이 성벽은 요르단에 속하였으나,

1967년 6월의 제 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구시가지를 점령하여 성벽은 이스라엘로 넘어왔다. 




성벽 틈에 꽂아놓은 쪽지들은

유대인들의 기도와 염원이 담긴 내용들이며 1년에 한차례 수거된다.


유대교에서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에 성인식을 거행하는 모습이다.
마침 오늘이 목요일이어서 성인식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성인식을 치를 아이가 팔에 감고 있는 검은 테이프는  '성구갑'이라고 하는데
구약에 '너희 손에 표징으로 묶고, 이마에 표지로 붙이라' 귀절을 인용해 양피지로 만들어진 작은 캡슐을
머리 또는 팔에 붙여 감는다.
 
남자들만 성인식을 치르며 여성은 입장이 금지 된다.
아이 엄마나 여성 친지들은 칸막이 너머 의자에 올라 이를 지켜보며 축하를 해준다.
 
이곳에 들어가는 모든 남자들은 '하느님을 경배한다'는 의미로 머리에 '키파'라고 하는 작은 모자를  써야 한다.
 
이 곳은 매일 24시간 개방되어 있지만 매주 금요일 오후에 시작되는 안식일 이후부터는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드는 시간이라 이때만은 사진 촬영이 금지된다.
 
사진은 아이와 아빠인듯...

여자[성인식을 치르는 아이의 엄마들...]들이
흰색 프라스틱 의자위에 올라가 칸막이 너머를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