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덕혜옹주 결혼 기념비와 조선 통신사비를 찾아...2014, 12, 01

2014. 12. 7. 16:50일본

 늦은 밤까지 옆방에서 들리는 이야기 소리에  

깊은 잠을 못 이루다가 후두둑 빗소리에 내일 일출은 꽝이다싶어 아침 7시 모닝콜이 올때까지 푹 잤다.

2014년의 끝달인 12월을 일본 대마도에서 맞이한다.

그러저러 날씨는 바람이 심하고 햇님은 반짝 났는데 일출을 보지 못한것이 못내 아쉽다.

일본식 청국장 낫또가 곁들여진 아침 차림 상...

하룻밤 머문 숙소 전경...

소음방지가 안되어 있는것 빼곤 불편한것은 없다.

출발 시간이 조금 남아 숙소 근처 해변으로 산책을 나간다.

해변으로 가는 길에 본...

 

가쯔미 해안...

태양은 이미 떠오르고... 바람은 세차게...

모래밭에 새긴 흔적...

해변에서의 인증...

비에 젖은 미끄럼틀... 누군가 먼저 탔어야 나도 신나게 타보는데...

 

속성으로 해변 산책을 하고 오니 버스가 대기하고 있다.

청수산 아래 금석산성은 옛날 대마도주가 거처했다는 곳으로 현재  노문(야쿠라문)이 복원되어 있고

그 안에 덕혜옹주 결혼봉축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대마도에 있는 성문 중, 가장 크고 아름답다고 한다.

우리네 성문보다 얄팍하고 날렵하다.

 청수산에 남아있는 성곽이 보인다.

비운의 왕녀 덕혜옹주의 결혼 기념비 안내판

덕혜옹주 결혼 기념비...

덕햬옹주와 일본인 남편

덕혜옹주 결혼봉축기념비 

 

비운의 황녀로 불리는 덕혜옹주...

 

그녀는 고종의 고명딸로 후궁인 양귀인에게서 태어났다.

내선일체를 내세운 일본에 의해 13세 어린 나이에 동경으로 보내졌고, 그곳에서의 학교생활은 순탄치 못하였다.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정신 질환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1931년 스무살의 나이에 대마도주의 손이었던 종무지와 강제 결혼하고 그 이듬해에 딸 마사에(正惠)를 낳았다.

그러나 

장성한 딸이 실종되어 의문을 죽음을 맞았고 덕혜옹주는 더욱더 정신 질환에 시달리며 비참한 일생을 살게 된다.

조선일보 김을한 기자(고종이 그녀와 약혼시키려 했던 김장한의 동생)가

덕혜옹주의 정신병원 감금 사실을 폭로하여 덕혜옹주의 삶이 세상에 알려졌고,

1962년 박정희에 의해 귀국하게 되어 7년간 병원생활을 했으며 이후

창덕궁 수강재(낙선재와 연결된 구역)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일생을 마감(1989년)한 비운의 황녀이다.

 

영친왕비 이방자가 결혼하던 해에 딱 한 번 대마도를 방문했는데,

그 당시 대마도에 살고 있던 우리 동포들이 하치만궁 경내에 결혼봉축기념비를 건립했다고 한다.

1955년에 종무지와 덕혜옹주가 이혼하자 대마도 사람들이 비를 뽑아 금석성 풀밭에 내동댕이쳤으나

이후 대마도-부산 직항 선박 취항으로 한국 관광객이 모여들자 이곳에 다시 세운 것이다.

 

봉축비 앞에 핀 동백꽃...

금석산성의 잔재

금석산성에서 본 이즈하라

 

유명산 하프 등산중에 본 편백나무 숲...

층층이꽃

한일 양국 교류의 상징 '조선통신사비'

 

 쓰시마번(對馬藩)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의 국교회복을 위해서 전력을 다하였고

결과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약 200년간 12회에 걸쳐서 통신사 사절이 일본을 방문하였다.

 

 조선통신사 일행은 300~500명 정도의 인원이었으며, 일본인들에게 선진 문화를 전파하였으며,

처음에는 막부 장군의 장군직 계승등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단의 임무에서 차츰 국서교환 등의 임무로 변화하였다.

 

 통신사의 방문으로 이루어진 활발한 교류와 우호관계를 21세기 한일우호의 지향점으로

삼고자 1992년 조선통신사비를 세웠다고 한다.

  

신사 입구

거리 트레킹 중에... 대마도는 어딜 가나 전기줄이 거미줄처럼 즐비하다...

예쁜 담쟁이...

부동산 중개소 간판...

 주택 골목 병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