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큰 감옥, 팔레스타인... 2012, 01, 10

2018. 1. 30. 16:04이스라엘


뉴욕 타임스는

한국의 비무장지대(DMZ)와 베를린 장벽,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장벽 등을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큰 '3개의 장벽'이라고 하였다.
 
베를린 장벽은 이미 무너져 자유가 왕래하고  있으며  
한국의 비무장지대(DMZ)는  지난 50여년간 인적이 끊기면서
풍부한 자연 보존지를 이루게 됐다면서 "녹색 장벽"으로 불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감옥...
 
 군인의 총검과 철조망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을 고립시켜오던 이스라엘은
이제는 5미터 높이의 콘크리트 장벽으로 '가자 지구'를 비롯한 팔레스타인 지역을 봉쇄하고 있다.
 
생존을 위해 팔레스타인인들은 메마른 사막 아래로 굴을 파 음식을 공수해 와야만 했다고 한다.
 
이 증오의 장벽 너머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장벽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거주지역 곳곳에 장벽과 검문소를 설치해서 수시로 문을 걸어 닫은채
팔레스타인인들의 이동을 가로막는 것은 물론, 때론 환자들을 위한 구급차의 통행을 막기도 한다.


이스라엘은 2002년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와 서안지구를 6m 높이의 분리 장벽으로 봉쇄했다.

 

현재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는

총 620㎞의 분리 장벽이 설치돼, 물자와 사람의 이동을 철저히 봉쇄하고 있다.

 

특히 가자지구에는 전기 철조망까지 설치됐다.

장벽의 대부분 구간은
콘크리트 기반에 5m 높이의 철조망으로 돼 있으며, 장벽 한쪽에는 4m 깊이의 도랑이 파져 있다. 
 
이로 인해
요르단과 서안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주민 수만명의 삶이, 땅과 직업과 학교로부터 격리된채 파괴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과격분자의 테러로부터 이스라엘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주장하며

'보안장벽'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팔레스타인은 이를 '분리장벽'이라고 부르며

팔레스타인 영토를 잠식하려는 이스라엘의 계략이라고 규탄하고 있다.

유대인이 1900년 동안 망명정부
를 끝내고 팔레스타인에 1949년 이스라엘을 세웠지만
그곳에 살던 200만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망명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이들은 분리장벽 안에 들어가 모든 행동에 제약을 받고 늘 이스라엘 군에 감시를 받는다.
 
그동안 이 벽 안에서 많은 전투와 희생이 있었고

장벽 안, 아이들은 늘 전쟁의 공포에 떨고 있으며 그로 인해 밝은 미소와 꿈을 잃어버렸다.

이전까지는 팔레스타인 사람 대부분이

산업이 발달한 이스라엘 지역으로 가서 일했지만 이동이 금지된 뒤 모두 실업자 신세가 됐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이스라엘인이 메소포타미아에서 가나안 땅(팔레스타인, 오늘날 이스라엘의 땅)에 들어온 것은

약 4,000년 전으로, 이곳에 정착하여 농경생활에 종사하고 유대 신앙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주변 강대국들에게 압박 당하여 일부 부족은 이집트로 이주하였으나,

이집트의 생활에 견딜 수 없어 영화 십계로 유명한 지도자 '모세'의 인도로 팔레스티나로 귀국하게 된다.
 
그후 BC 1세기에는 로마의 속주로 편입되는데

로마 제국에 저항하여 티투스 황제 때 마사다요새의 전투를 끝으로 참패한 이스라엘인들은

세계 각지로 흩어져 오랫동안 표류하며 박해받는 생활을 하기에 이른다.
 
19세기에 들어서자

유대인들 사이에 자신들의 조상이 하느님으로부터 약속받은 성지 팔레스타인[가나안]으로 돌아가

조국을 세워야만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끝난다고 믿는 시오니즘이 싹트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영국은

당시 중동에서의 영국군 작전기지 역할을 맡고 있던 팔레스타인 땅을 지키기 위해 전세계 유대인의 협력을 얻고자

'밸푸어' 선언을 발표하고, 전 후,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조국 건설을 허락한다는 약속을 한다.
 
이와 함께 전 후, 동유럽 여러 나라에서 유대인에 대한 압박이 심해지고

독일에 히틀러의 나치즘이 등장하여 유대인에 대한 대학살을 개시하면서

시오니즘 운동은 급속히 발전하여 팔레스타인에의 유대인 이민은 격증하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7만 정도였던 유대인 인구는

세계 각지로부터 돌아온 이민을 맞아들여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약 40만으로 늘어나게된다.

유대인 이민의 증대는

팔레스타인에 정착해 살던 아랍인과의 대립을 가져왔고 이를 두려워한 아랍인은 폭동을 일으켰고,

1938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는 1939년까지는 전국적으로 게릴라전을 전개하게된다.
 
영국은 두 민족의 대립을 진압하여

전략적 요충지인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배권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1947년 문제를 국제연합에 떠 넘긴다.
 
UN 총회는

1947년 11월 팔레스타인에 아랍·유대 연방을 조직하게 하는 연방화 안과

아랍·유대의 개별 국가를 건설하여 예루살렘을 국제 관리하에 두도록 하는 분할안 중,

후자를 2/3 이상의 다수로 채택하였는데 이 안을 유대인 쪽은 찬성하였으나

아랍 쪽은 반대하여 팔레스타인 각지에서 게릴라전을 개시한다.

1948년 5월 14일 영국의 위임 통치가 끝나고 영국군의 철수완료와 함께

유대 국가 건국 위원회 의장 벤 구리온이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하게 된다.
 
동시에 아랍연맹에 가입한 아랍 제국의 정규군이

팔레스타인에 침입하여 제1차 팔레스타인 전쟁이 개시된다.
 
이스라엘은 소수로 처음에는 열세였으나 마침내 아랍을 압박하여 1949년 정전이 실현된다.

 
그러나 그 뒤에도 아랍 대 이스라엘의 대립은 계속되어

1956년 10월 제2차 중동전쟁, 1967년 6월 제3차 중동전쟁,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등

모두 4차례에 걸친 전쟁을 하였다.
 
현재도 그들은 평화 안을 협의하고도 다시 전투를 벌이는 등,

 이 두 지역의 갈등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지속될것으로 보인다.

 

성지 순례 중, 버스로 이동하면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넘나들며 담은 몇 장의 풍경이다.


장벽을 넘나드는 곳에 검문소가 있는데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으로 넘어가면 직선 인, 찻길이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로 들어 오는 찻길은 S자로 되어 있어

유사 시, 속력을 낼수 없게 고안된 모양이며, 검문  또한 무척 까다롭다.

 

여차하면 여권 검색까지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생활 혜택도 이스라엘은 물 공급이 원활해 옥상에 비축용 탱크가 흰색으로 하나뿐이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기본적인 흰 색 물통 이외,

검은 색으로 된 물통을 여러개 더 비치해 둔것을 볼수 있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하루에 30L 정도의 물을 사용한다.

세계보건기구(WHO)의 권고량인 100L의 30% 수준이다.

 

젖과 꿀이 흐르던 가나안은 이제 물 한 방울 얻기도 힘든 척박한 땅이 돼 있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을 넘나들며

불쌍한 민족과, 얄미운 민족을 동시에 보게 되는 동병상련의 짠~한 현장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