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의 설경... 2024. 01. 21

2024. 1. 25. 22:01남한산성의 풍경과 꽃

주말 아침에 내다본
남한산성의 설경이 멋져
아침 밥 숟가락을 놓자마자 서둘러 남한산성에 갔다. 

신년들어 첫 산행으로 
그동안 보아온 남한산성의 雪景 중, 최고였다. 

남한산성은
사적 제  57호이며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경기도 도립공원이다.

 
사진을 많이 추렸는데도 버리기 아까워 올려 봅니다. 
 

남문(至和門)
 
남한산성의
네개의 대문중에 가장 크고 화려하다.
 
병자호란때 인조께서
남한산성의 주민이었던 서흔남에 업혀 들어온 문이다.
 
지화문이란 이름은
"인화가 없다면 누굴 믿고 성을 지킬것인가" 하는
정조의 뜻에 따라 지어졌다고 한다.
 

남문 문루에 올라가서 본 풍경
 

남문에서 내려다 본 풍경
 

남문 안 쪽
 

수어장대로 발길을 옮기면서 본 풍경. 영춘정 쪽.
 

성곽너머로 본 풍경 
성남공항 활주로가 보이고 우측 아파트는 위례신도시
 

성곽길
 

송파구 일부와 강남구.
우측 끝부분에 삼성동 무역센터가 보인다.
(사진엔 작게 나와서 잘 안보임)

 

 

성곽길에서 본 풍경.
좌측 청계산과 망경대 & 우측은 관악산
 

제6암문 앞 성곽에서 본 성남 시가지
 

좀더 당겨 우리 아파트도 보고...
 

수어장대로 들어가는 문 우측에 협문이 있고 
협문 옆에 벽을 뚫고 자라는 향나무 한그루가 있다. 
 
수고 2.5미터. 둘레250센티. 수령 400년으로
경기광주 보호수 제 15호로 지정되어 있다.
 

수어장대 (守禦將臺)
 
장대는
지휘와 관측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으로
남한산성엔 5개의 장대가 있었으나 현재는 수어장대만 남아있다. 
 
수어장대 현판은 헌종 2년(1836)에
유수를 지낸 박기수의 형, 박주수가 쓴 것이라고 한다.
 
우측 작은 전각은 무망루 편액이 걸려있는 보호각으로 
병자호란(1636)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끌려갔다가 귀국 후,
북벌을 꾀하다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이름지은 것이다.
 
보호각 우측에 전나무(앞의 나무에 가려 안 보임)는
이승만 대통령이 심은것이라고 한다. 

수어장대 주밍샷
 

수어장대 담장 모서리에 있는 바위
 
수어장대라고 새겨져 있는 이 바위는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이회 장군을 바라보던 매 한마리가 앉아 있었다고 한다. 
 

수어장대와 같은 담장안에 있는 청량당
 
청량당은
이회와 그의 부인 송씨, 그리고 벽암대사를 모신 사당이다.
 
남한산성의 성을 쌓을때
동남쪽을 맡았던 이회는
기일내에 공사를 마치지 못하고 비용도 바닥이 나자 
다른 곳에 탕진하느라 공사를 게을리 했다는
누명을 쓰고 처형을 당하였는데
그의 부인 송씨도
남편의 일을 돕기위해 비용을 구해
남한산성으로 오던중 이회의 죽음 소식을 듣고
한강에 빠져 자결하였다고 전해진다. 
 
나중에 알고보니 
꼼꼼하게 쌓느라 비용이 부족했다고 한다.
 
청량당이라 한것은
수어장대가 있는 산이름이
청량산이라는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서문으로 가는 길
 

서문(우익문. 右翼門) 행궁 우측에 있는 성문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47일간의 항전끝에
청나라에 항복하러 송파 삼전도로 가기 위해 나갔던 문이다.
 

서문에서 전망대 오르는 길
 

새 모이를 주는 분이 있어서 몇장 담아 보았다.
 

서문과 새에게 보시를 하는 분
 

전망대에서 본 서울 시내
 
롯데타워 뒤로 한강과 남산이 보인다.
 

 
 

내려가면서 다시 담아본 서문
 

소나무 숲.
 
남한산성은
수도권에서 가장 큰 군락을 이루는 소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으며
6.25전쟁때에도 남한산성 주민들이 화재로부터 지켜냈다고 전해진다. 
 

북문으로 내려가다가 조망 한번 더 하고...
 

구리시 전경
 

당겨서 보니 유니온타워가 보인다.
팔당과 멀지않은 곳이고 한강이 보인다. 
 

몇년만에
해체 복원 공사가 끝난 북문(전승문. 全勝門)
 
병자호란 당시,
기습 공격을 감행했던 문이다.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따라
군사 300명이 북문을 나가 법화골에서 청군을 공격하였으나 
적의 계략에 모두 전멸하고 말았다. 
 
정조 3년(1779)에 성곽을 개보수 하면서
성문을 개축하고 그때의 패전을 잊지말자는 뜻 에서
전승문이라고 하였다. 
 
 

행궁 앞, 인화관(人和館) 뒤편
 
중앙에서 내려온 관리나 외국 사신이 머물던 객사.
 

종각
 
조선시대
4대 명종으로 손꼽히는 국보로
천안  성거산 천흥사 동종 (銅鐘)이 있었으나
일제 감정기 때 창경궁으로 옮겨진 후,
현재는 국립 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전시한 종은
주철장 원광식씨가 복원한 것이다. 
 
행궁도 한바퀴 돌고
동문도 다녀올 계획이었으나 
눈도 녹고 있는데다 올라오는 차량이 밀려 
아쉬운 마음으로 하산했다.